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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제일 행복한 도시, 여깁니다[18일간의 미국서부 일주 ⑪] 미국 떠나며 얻은 깨달음 '모든 순간은 늘 마지막 순간'
임은경 | 승인 2016.03.2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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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0일 오후에 찍은 LA 서쪽의 산타모니카 해변

9월 17일 목요일. 푹 자고 일어나 영진 누님과 함께 마당의 나무 데크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드신 토마토소스에 난을 곁들여 과일과 커피와 함께 먹었다. 키위와 포도를 썰어 넣은 요거트는 색으로 눈을 즐겁게 했고, 파라솔 아래로 부는 바람과 졸졸졸 개울물 소리가 밥맛을 돋우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개방적인 영진 누님과의 아침식사는 갖가지 화제가 꽃피는 즐거운 수다 시간이었다. 아침을 먹는 동안 나비와 벌새가 날아들었다.

새 모이통에 설탕물을 담아 놓았더니 그것을 먹으러 종종 벌새가 날아온다고 했다. 벌새를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몸매가 날렵하고 몸놀림은 벌처럼 재빠르다. 캘리포니아의 다른 주택들처럼 역시 목조로 지어진 이 집은 하얗게 칠해진 외벽과 발코니, 뒷마당의 초록 풀밭 옆에 금붕어가 헤엄치는 작은 개울이 로맨틱한 집이다. 밤에는 마당을 비추는 조명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산속에 들어온 듯 평화로운 기분을 선사했다.

아침식사 후 LA에 사시는 종혁씨의 큰고모님이 오셔서 함께 근처의 아빌라 온천(Avila Hot Springs)에 갔다. 규모는 작지만 미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유황 온천이다. 시설은 오래되었지만 질 좋은 진짜 유황물이 쏟아지는 열탕과 수영장까지 있어서 가족 나들이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샤워장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오니 계란 썩는 것 같은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한다. 따끈한 열탕에 몸을 담그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노천욕을 즐겼다.

온몸이 노곤해진다. 긴 여행의 피로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다. 좋은 유황 온천은 병을 고친다고 한다. 영진 누님도 소화기관을 비롯해 체력이 전반적으로 약했는데, 이곳을 다니면서 많이 건강해졌다고 했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손님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파킨슨병으로 손을 심하게 떠는 할아버지,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 온천욕 꾸준히 하셔서 병세가 나아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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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여행 후반부에 편안한 휴식을 취한 피스모비치 영진 누님의 집
 

 

점심은 영진 누님이 피스모비치에서 이십년 넘게 운영해온 '우미스시'에서 먹었다. 각종 스시와 아보카도를 넣은 연어 롤 등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새우튀김과 생선회를 밥과 함께 만 '스파이더롤'은 정말 최고였다. 고소하고 향미가 깊은 새우튀김이 신선한 스시와 함께 씹히면서 입 안 가득 맛의 즐거움을 누렸다.

주방과 서빙 종업원들은 모두 중남미인들이고 손님은 대부분 백인이다. 사장인 영진 누님과 십년 이상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직원들은 우리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며 따뜻한 호의를 표했다. 점심 후 집에 돌아와 고모와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후 나절을 보냈다. 누님은 식당이 가장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면 저녁 전까지 잠시 가게 문을 닫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차고에 있는 세탁기에 그동안 싸들고 다니던 밀린 빨래도 했다.

오랜만에 먹은 집밥과 유황온천... 여행 막바지의 휴식

저녁에는 근처에 있는 산루이스오비스포(San Luis Obispo) 시내 구경을 나갔다. 이곳에서 목요일마다 농부 장터(Farmer's Market)가 열린다는 영진 누님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루이스오비스포는 이 일대 중부 캘리포니아 해안지역의 중심 도시다. 장터에 도착했더니 밭에서 막 수확해온 농산물을 실은 트럭들이 한창 짐을 부리고 있다.

호박, 양파, 무, 가지, 토마토, 고추, 마늘, 감자, 그리고 온갖 종류의 딸기, 사과, 오렌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먹을거리들. 땅의 기운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농산물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빛이 난다. 직접 재배한 올리브로 짠 올리브유와 양젖 치즈, 직접 만든 라벤더 에센셜 오일, 차를 발효시켜 만든 곰부차(Kombucha) 등 다양한 가공품을 파는 부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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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 장터의 양젖 치즈 부스. 앞에 보이는 둥근 치즈 한 덩이를 50달러에 샀다. 제대로 발효시켜 깊고 진한 향을 지닌 이 치즈는 여행이 끝나고도 한 달쯤 우리의 저녁 술자리를 즐겁게 했다.
 

 

샘플을 시식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키웠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농부와 직접 대화를 나누며 들을 수 있는 먹을거리 이야기는 농부 장터의 진정한 매력 중 하나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종이컵에 시식용 올리브유를 따라주던 백인 할머니는 한국인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건넨다. 자기네 농장 근처에 한국인 친구가 사는데 자기도 한국 음식에 관심이 많다면서.

그녀가 따라준 올리브유는 씁쓸하고 진한 올리브 향이 살아있다. 오직 수익을 위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다. 내 몸에 들어와 살과 피를 만드는 음식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것은 차가운 슈퍼마켓 진열대가 아니라 땅에서 나와야 하고, 만든 이의 정성과 숨결이 들어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날 마침 멕시코 독립기념일(9월 16일) 행사와 겹쳐 장터는 밤이 깊을수록 인산인해다. 천천히 구경을 다니며 1kg쯤 되는 양젖 치즈 한 덩어리와 말린 사과 칩, 크림치즈와 허브로 만든 치즈 딥을 샀다. 팔뚝만한 구운 옥수수와 피자, 돼지 등갈비구이 등 저녁거리도 사먹었다. 한쪽에서는 바닥에 매트를 깔고 지역 아이들의 체조 경연이 펼쳐지고, 밴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이들은 자기네 고장을 스스로 'City of SLO'라고 부른다. SLO는 산루이스오비스포(San Luis Obispo)의 약자이지만, 발음이 비슷한 'slow(느린)'라는 단어를 의도하고 쓴 듯하다. '미국에서 제일 행복한 도시(Happiest City of America)'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이 도시 사람들의 '느린 행복'에 동화되어 밤이 늦도록 장터와 시내를 걸었다. 

'미국에서 제일 행복한 도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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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루이스오비스포 시내에서 열린 멕시코 독립기념일 행사
 

 

9월 18일 금요일. 오전에 고모와 고모의 막내 아들인 수노 삼촌과 함께 산루이스오비스포 외곽에 있는 코스트코에 쇼핑을 갔다. 코스트코는 한국에도 있지만 실제로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뭐든지 벌크로 파는 그 규모에 놀라고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며칠 전 월마트에서 6달러 정도에 샀던 샐러드 채소 팩이 여기선 4달러도 안 되니 거의 반값이다. 수노 삼촌이 점심 요리에 쓸 식재료를 고르는 동안 우리는 한국보다 싼 유기농 원두커피와 미국산 잣 등을 샀다.

수노 삼촌 집에 가서 직접 만들어주신 돼지고기 허브찜과 샐러드에 빵과 와인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수노 삼촌은 LA에서 자기 식당을 경영해온 오너 셰프다. 로즈마리 잎을 넣어 구운 고기도 육질이 부드러웠지만, 물소젖 치즈에 신선한 망고와 토마토를 얹어 달콤한 발사믹 식초로 마무리한 샐러드는 지금껏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맛의 포인트는 싱싱한 생 바질 잎. 바질의 미묘한 향기가 고소한 치즈와 함께 아삭하게 씹히는 싱싱한 채소에 조화롭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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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스모비치 해변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았다.
 

 

오후에는 피스모비치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곳은 대합 류의 대형 식용 조개인 피스모 클램이 많이 나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피스모 조개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잡아서 지금은 보호종이 되었다. 썰물 때는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23마일의 해변 모래사장을 자동차로 달려볼 수 있다. 타원형으로 둥근 수평선이 온 시야를 가득 채운다. 보이는 것은 모래사장과 드넓은 바다 뿐. 바다가 내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만 같다.

눈앞에 보이는 태평양 속으로 해가 느릿느릿 빠지면서 푸른 바다가 붉게 물든다. 나무로 된 선착장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고기를 낚고, 그 아래서는 동네 청소년들이 때마침 들어오는 밀물에 맞춰 파도를 탄다. 이 동네 아이들은 이렇게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자연과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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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스모비치의 석양을 바라보며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
 

 

피스모비치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나 이런저런 구경거리가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영진 누님의 둘째 아들 테오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몇 해 전에 남편이 돌아가신 후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누님도 아이에게 '무엇이 되라'는 강요를 하지 않는다.

테오는 우리가 도착한 첫날밤부터 친근하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넸다. 첫날은 '야참을 해먹을 건데 삼촌도 같이 먹겠느냐' 묻더니, 다음 날엔 '저녁 모임에 입고 갈 옷을 골라 달라'며 옷을 들고 왔고, 심지어 그날 모임에서 만난 여자와 '썸'을 타다 아쉽게 헤어진 얘기까지 했다. 테오는 우리에게 그냥 수다를 떤 것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 처음 온 우리가 어색할까봐 자기가 할 수 있는 배려를 베푼 것이었다.

종혁씨가 미국을 떠날 무렵 코흘리개 꼬맹이였다는 아이는 피스모비치의 넓은 해변을 닮아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젊은이로 자라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한국 청년이라면 과연 십 몇 년 만에 만나는 외삼촌과 생전 처음 보는 숙모에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했을까. 그리고 한국의 부모들 같으면 아들의 꿈이 판·검사나 의사가 아니고 소방관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피스모비치의 해변을 닯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코스트코에서 일하던 백발이 성성한 백인 할머니도 생각이 난다. 70대 후반이 넘어 보이는 얼굴에 빨간 립스틱을 정성껏 바르고 서 있던 할머니. 손님이 오니 미소를 띠며 샘플 시식을 권한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다른 이의 눈치를 보는 태도는 없었다. 그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일한 만큼 봉급을 받아갈 뿐이다.

이번 미국 여행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라스베가스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다음날 방문한 LA 할리우드 같은 유명한 관광지들이 아니었다. 내 뇌리에 남은 것은 바로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이었다.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유타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 피스모비치의 해변처럼 평화로운 이곳 바닷가 마을 주민들의 삶.

미국은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생활환경과 삶의 질이 천차만별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금융가나 IT업체가 밀집한 산호세에서는 스트레스가 오를 대로 오른 바쁜 사람들의 강퍅한 냉정함이 지배적인 분위기다. 운전할 때 옆 차선 진입도 쉽지 않고, 가게 손님이 아니면 화장실도 못 쓰게 할 정도다. 그 도시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돈? 일의 성공?

그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이 해변 동네에는 그 바쁜 대도시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지금의 시간을 희생하고 저당 잡혀 살지 않는 것. 나와 타인의 삶을 비교하며 쓸데없이 불행해하지 않는 것. 가장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보낼 줄 아는 지혜였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미국영화에서는 돈으로 시간을 산 부자가 지루하게 계속되는 삶에 허무를 느낀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어떤 영원한 삶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비교할 수는 없다.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늘 마지막 순간을 산다. 나는 언젠가 올지 (혹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지금을 저당 잡혀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할 수 있을 때 하고, 갈 수 있을 때 어디든 떠날 것이다.

그 어떤 삶도 지금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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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된 배우 제임스 딘. 산 위의 하얀 'HOLLYWOOD' 글씨를 배경으로 LA 그리피스 천문대에 서 있는 조각상
 

 

다음 날인 19일에는 영진 누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고모님과 수노 삼촌과 함께 LA로 향했다. 그날 저녁에는 사촌들과 함께 LA 시내의 대복 식당에서 아구찜과 복 탕수육으로 식사를 했다. 20일에는 그리피스 천문대에 올라갔다가 할리우드 대로와 산타모니카 해변을 차례로 돌며 구경했다. 햇볕이 쨍쨍한 해변의 경치는 소문대로 아름다웠지만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몸은 파김치가 될 지경이었다.

할리우드 대로에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스파이더맨과 '겨울왕국'의 엘사는 머리부터 발까지 땀에 푹 절어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눈치였다. 결국 오후에는 베버리힐즈 근처에 있는 대형 쇼핑몰의 에어컨 아래로 잠시 대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LA 외곽의 로렌하이츠에서 지인을 만나 중국식 로브스터 요리와 대합 찜, 차오펀으로 저녁을 먹었다.

LA에 있는 동안은 다운타운 근처 노인아파트에 혼자 사시는 고모님 댁에 머물렀다.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사시는 이 아파트에서 고모님은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며 다른 노인들과 어울려 살고 계셨다. 21일 아침에는 텃밭에서 수확해 온 열무와 얼갈이배추로 담근 김치와 미역국, 알이 꽉 찬 큼지막한 조기 구이로 차려주신 밥상을 받고 낮 12시 반에 출발하는 상하이행 비행기를 타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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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내려다본 LA 시내 전경. 멀리 다운타운은 스모그가 끼어 흐릿하다.

임은경  atree12f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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